마가 렛 캠벨 (마거릿 캠벨, 아가일 공작부인) – – 공작부인의 혼 뉴스 캔들 (매우 영국적인 스캔들)

마가 렛 캠벨 (마거릿 캠벨, 아가일 공작부인) – – 공작부인의 혼 뉴스 캔들 (매우 영국적인 스캔들)마거릿 캠벨(Margaret Campbell, Duchess of Argyl, 1912–1993)은 영국의 귀족이자 사교계 인사로 두 번째 남편이었던 이안 캠벨(Ian Campbell, 11th Duke of Argyl, 1903–1973) 공작과의 이혼 스캔들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녀는 이혼 소송 당시 불륜의 증거가 담긴 사진으로 영국인들 사이에서 ‘더러운 공작부인(The Dirty Duchess)’으로 불리며 마녀사냥에 가까운 비난을 받았고, 평생을 주홍글씨를 안고 살아야 했다.

마거릿 캠벨은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조지 헤이 햄(George Hay Whigham)의 외동딸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스코틀랜드의 유서 깊은 집안 출신으로 성공한 백만장자였다고 한다.

마거릿은 14세 무렵까지 미국 뉴욕에서 자랐다고 하는데 사립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부터 아름다운 외모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마가렛의 어린 시절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아버지의 외도로 인해 그녀의 부모님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마가렛도 말을 더듬는 습관으로 언어치료사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고 한다.

당시 그녀의 언어치료사는 영국 조지 6세의 말더듬 증상을 개선한 라이오넬 로그(Lionel George Logue)였다고…1928년 여름, 15세의 마가렛은 영국의 휴양지인 와이트섬(Isle of Wight)에서 당시 18세의 나이로 사관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던 배우 데이비드 니븐(David Niven, 1910-1983)과 만나게 되는데, 그와 사랑에 빠진 그녀는 혼전 임신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마가렛은 부모에게 사실을 고백하게 되는데, 그녀는 화가 난 아버지에 의해 런던의 한 요양시설에서 비밀리에 낙태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마가렛은 첫사랑 데이비드와 헤어진 뒤 평생 그를 잊지 못했다지만 훗날 그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다고 한다…1928년 여름, 15세의 마가렛은 영국의 휴양지인 와이트섬(Isle of Wight)에서 당시 18세의 나이로 사관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던 배우 데이비드 니븐(David Niven, 1910-1983)과 만나게 되는데, 그와 사랑에 빠진 그녀는 혼전 임신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마가렛은 부모에게 사실을 고백하게 되는데, 그녀는 화가 난 아버지에 의해 런던의 한 요양시설에서 비밀리에 낙태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마가렛은 첫사랑 데이비드와 헤어진 뒤 평생 그를 잊지 못했다지만 훗날 그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다고 한다…1928년 여름, 15세의 마가렛은 영국의 휴양지인 와이트섬(Isle of Wight)에서 당시 18세의 나이로 사관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던 배우 데이비드 니븐(David Niven, 1910-1983)과 만나게 되는데, 그와 사랑에 빠진 그녀는 혼전 임신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마가렛은 부모에게 사실을 고백하게 되는데, 그녀는 화가 난 아버지에 의해 런던의 한 요양시설에서 비밀리에 낙태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마가렛은 첫사랑 데이비드와 헤어진 뒤 평생 그를 잊지 못했다지만 훗날 그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다고 한다…알리 칸 & 막스 아이켄, 제2대 준남작Prince George, Duke of Kent&Glen Kidston 1930년 17세의 마가렛은 사교계에 데뷔하지만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와 아버지의 재력으로 영국 켄트 공작(Prince George, Duke of Kent), 파키스탄의 개미·칸(Aly Khan)왕자, 비행기 조종사인 정치가였던 막스·에이트 켄(Sir Max Aitken, 2nd Baronet)등 많은 남성의 관심의 대상이 됐다고 한다.

이 시기 마거릿은 비행기 조종사인 카 레이서였던 글렌·킷도송(Glen Kidston, 1899– 1931)와 만남을 가진 것 같지만, 그는 이미 결혼해서 아이가 있는 기혼 남성이었다고…… 그렇긴 두 사람의 관계는 1931년 글렌·킷도송이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끝나게 되는데, 그녀는 잠시 슬픔에 빠졌다.

이후 마거릿은 귀족 출신 영국 배우였던 찰스 그레빌(Charles Greville 7th Earl of Warwick, 1911-1984)과 약혼하는데, 이들은 마거릿이 미국인 사업가이자 프로골퍼였던 찰스 스위니(Charles Francis Sweeny, 1909-1993)와 만나 1932년 약혼을 파기하게 된다.

이후 마거릿은 귀족 출신 영국 배우였던 찰스 그레빌(Charles Greville 7th Earl of Warwick, 1911-1984)과 약혼하는데, 이들은 마거릿이 미국인 사업가이자 프로골퍼였던 찰스 스위니(Charles Francis Sweeny, 1909-1993)와 만나 1932년 약혼을 파기하게 된다.

이후 마거릿은 귀족 출신 영국 배우였던 찰스 그레빌(Charles Greville 7th Earl of Warwick, 1911-1984)과 약혼하는데, 이들은 마거릿이 미국인 사업가이자 프로골퍼였던 찰스 스위니(Charles Francis Sweeny, 1909-1993)와 만나 1932년 약혼을 파기하게 된다.

1933년 2월, 마거릿과 찰스는 결혼하게 되지만 그녀의 웨딩 드레스는 훗날 영국 퀸 마더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드레스를 제작하고 왕실 디자이너 노먼·하트 네루(Norman Hartnell)가 디자인했고 그들의 결혼식에는 3000명 가까운 인파가 몰려들어 교통 체증까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가렛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그들 부부는 아이를 가지려고 8번의 유산을 경험해야 하며 1933년에 태어난 그녀의 첫째는 8개월의 조산아 출산 직후 사망했다고 한다.

그 뒤 그들은 두 아이가 태어나지만, 마거릿은 육체적, 심리적으로 큰 상처를 입게 됐다고……이에 나이 1943년 마가렛은 진료 때문에 주치의를 방문하러 갔다가 엘리베이터가 추락하는 사고를 당하게 되지만 이 것은 그녀의 인생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간신히 목숨을 구한 그는 머리 상처를 33바늘이나 꿰매는 크게 다쳤다는데 이 일을 겪은 뒤 그녀는 성에 집착하게 됐다고 한다.

1947년 마가렛은 남편과 이혼하게 되지만 마가렛은 찰스와 이혼 후, 그를 비난하고 남편이 원한 것은 아름답지만 머리가 텅 빈 아내라고…이에 나이·이혼 후 마가렛은 자신이 원하는 남성들과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데이트를 시작했다는데, 주변 사람들의 회상에 따르면 그녀는 엘리베이터 사고 이후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였다며 자신을 ” 새로운 머리(bird head)”이라 부르며 용모를 갖추는 것 이외에는 다른 일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1951년 마거릿은 이안 캠벨 공작과 결혼하게 되는데, 그는 당시 두 번의 결혼생활을 거친 이혼남으로 도박중독에 알코올중독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안 캠벨 공작이 마가렛과 결혼한 이유는 그녀의 재산으로 생활을 유지하고 도박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지만, 그에게 그녀는 단지 은행 계좌에 불과했다고 한다.

결혼 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마가렛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게 되는데, 그녀는 동시대 인물 중 아름답고 세련된 여성으로 유명해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많은 디자이너의 뮤즈가 됐지만 이안 캠벨 공작에게는 그저 또 다른 아내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1959년 그들의 이혼 소송이 시작되지만 이안·캠벨 공작은 마거릿이 자신에 대한 지원을 중단한 뒤 아내의 불륜에 대한 증거를 잡기 위해서 그녀의 자동차에 도청 장치를 달아 마거릿이 살던 런던의 저택에 몰래 침입하는 불륜의 증거를 찾아냈다고 한다.

당시 그는 아내의 침실의 서랍에서 수수께끼의 상자를 발견했다고 하지만 그 안에는 편지와 일기장, 폴라로이드 사진이 들어 있었다고…이에 나이·재판에서 이안·캠벨 공작은 사진을 증거로 그녀를 공격했다고 하지만 그가 증거로 내민 사진은 마가렛이 결혼 생활 중에 88명의 남성들(headlessman)과 찍은 사진으로 사진 속에서 남성들의 신원은 몰랐지만 그녀와 그들의 육체 관계가 적나라하게 비추고 있었다고 한다.

한편 마가렛도 이에 대항하고 이안·캠벨 공작 또한 결혼 생활 중에 여러가지 여성들과 불륜을 저질렀다고 증언했지만 그녀는 남편이 그의 계모인 Jane Corby Whigham과 관계를 가졌다고 말했지만 자신의 사진에 의한 여파가 너무 커서 그녀의 주장은 힘을 얻지 못했다고 한다.

1963년까지 4년 열린 그들의 재판은 영국인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녀는 많은 사람들에게 “The Dirty Duchess”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모욕된 것으로 알려졌다.

마가렛의 불륜 사실이 알려지자 언론은 대대적으로 마가렛과 관계를 맺은 얼굴 없는 남성에 대한 취재를 시작했다는데 이들은 이 스캔들에 2명의 장관, 3명의 왕실 관계자, 할리우드 배우 등이 연루됐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당시 윈스턴 처칠의 사위였던 정치인 던컨 샌디스(Duncan Sandys)와 할리우드 배우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주니어(Douglas Fairbanks Jr.)는 실명이 거론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던컨 샌디스는 스캔들이 터지자 장관 자리를 사임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가렛 & 딸 프랜시스(프랑스 매너스, 라트랑드 공작부인)마가렛 & 딸 프랜시스(프랑스 매너스, 라트랑드 공작부인)마가렛 & 딸 프랜시스(프랑스 매너스, 라트랑드 공작부인)1963년 마가렛의 이혼 재판은 그녀가 남편에게 거액의 위자료를 내고 끝나게 되지만 이혼 후 그녀는 악화된 재정 상태여서 관광객의 돈을 받고 런던에 있는 그녀의 집을 개방한 것으로 전해졌다.

1978년 빚을 갚느라 집을 치웠다 마가렛은 인근 호텔로 거처를 옮기게 되지만 그 뒤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 방송에 게스트로 등장하는데, 이전의 사치 생활을 정리하지 못하고 그녀의 경제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다는.그 후 그는 호텔 요금을 내지 않고 다시 아파트에서 살게 됬다고..···1990년대가 되면 몸이 불편한 마가렛은 아이들에 의해서 요양 시설에 들어가게 되는데, 1993년에 거기서 81세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샐리의 부산 룻크웃도 묘지(Brookwood Cemetery)에 있는 첫번째 남편 곁에 안장됐다는.1963년 마거릿의 이혼 재판은 그녀가 남편에게 거액의 위자료를 주고 끝나게 되는데 이혼 후 그녀는 악화된 재정 상태 때문에 관광객들에게 돈을 받고 런던에 있는 그녀의 집을 개방했다고 한다.

1978년 빚을 갚기 위해 집을 정리한 마거릿은 인근 호텔로 거처를 옮기게 되는데, 이후 그는 돈을 벌기 위해 TV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하지만 예전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정리하지 못해 그의 경제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다고 한다.

그 후 그녀는 호텔 요금을 내지 못해 다시 아파트에 살게 됐다고…1990년대가 되자 몸이 불편해진 마가렛은 아이들에 의해 요양시설에 들어가게 되는데 1993년에 그곳에서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후 그는 샐리의 브룩우드 묘지(Brookwood Cemetery)에 있는 첫 번째 남편 곁에 묻혔다고 한다.

사진, 자료 출처 – factinate.com/, wikipedia.org/, honey.nine.com.au/, maryevans.com/,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