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현재 살아 있다.
” 산 “이라고 표현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삶은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순간이 모여서 만든 연속이기 때문이다.
연속적인 인생에서 우리는 수없이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죽음이라는 종착지가 명확히 규정된 트럭에서 종종 무의미함을 느끼는 것도 있다.
오늘 하루 아득바득 살아가도 같은 내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고 며칠도 열심히 일해서 번 휴일은 화살처럼 지나간다.
다시 주 중이 다가오기를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미리 겪고 있다.
산다는 것은 존재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를 안타깝게도 우리의 소망이 이뤄진 것은 아니지만 결국 태어난 이상 살아야 할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실존이다.
실존 주의라고 실존 철학이니,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내가 지금 살고 있다는 사실 하나는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내가 내 인생에서 의미 없는 존재처럼 생각할 것인가.그렇다면 나 없는 세계를 한번 생각하고 보세요.나 없는 세상을 상상하면 뭔가 잘 될 것 같다.
무슨 일도 없는 것 같다.
다만 내가 죽은 뒤 운이 좋으면 뉴스 기사에 몇줄 정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정확히 잘못된 것 같아요.나 없는 세계는 정의할 수 없다.
원래 내가 세상을 바라보고 있어야 이 세상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는 동안에 세상은 존재하지만 내가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보통 꿈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다른 나라에 가게 처음부터 인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 살아있다.
‘살았다’고 표현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삶은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순간이 모여 만든 연속이기 때문이다.
연속적인 삶 속에서 우리는 수없이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죽음이라는 종착지가 명확하게 정해진 트랙에서 때때로 무의미함을 느끼기도 한다.
오늘 하루, 악착같이 살아나도 똑같은 내일이 나를 기다리고, 며칠씩 열심히 일해서야 얻는 휴일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또다시 평일이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걱정해 미리 고통받고 있다.
산다는 것은 존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가 안타깝게도 우리의 바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지만, 결국 태어난 이상 살아야 하는 존재가 돼버렸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실존이다.
실존주의니 실존철학이니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는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내가 내 삶 속에서 의미 없는 존재인 것처럼 여겨지는가. 그렇다면 내가 없는 세상을 한번 생각해 보라.내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면 뭔가 잘 될 것 같다.
아무 일도 없을 것 같다.
다만 내가 죽은 뒤 운이 좋으면 뉴스 기사에 몇 줄 정도 적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정확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해.내가 없는 세상은 정의할 수 없다.
애초에 내가 세상을 바라보고 있어야 이 세상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는 동안 세상은 존재하고 있지만 내가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보통 꿈나라로 간다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다른 나라로 가는 것처럼 아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에 의한 세계, 나에 의한 세계
당신의 세계는 당신이 존재하니까 존재할 수 있다.
내 세계는 내가 존재하기에 존재할 수 있다.
당신의 세계에서는 내 존재가 중요하지 않을까도 모르듯이 내 세계도 그렇다.
결국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나일 수밖에 없다, 내가 천한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멋진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그것은 하나의 껍데기인 것이며, 그 중요도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이를 깨닫기가 매우 어렵다.
나도 글에서는 화려하게 표현할 수 있어도, 실제로 그런 태도를 인생에 적용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를 인정해야 한다.
또 우리는 이미 DNA단계에서 결정된 특정 형질의 덕분에 내가 굳이 고생하지 않아도 얻는 다양한 특성을 보유하고 있다.
이는 제가 원하는 방향만으로 성취되지 않는다그 특성은 키가 크고 잘생겼다 하는 외적인 좋겠지만 거꾸로 성인병에 취약하거나 암 발병률이 높은 체질일 가능성이 있는 건강상의 장난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수십 만년을 거쳐서 진화한 몸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우리는 약한 존재이며, 작은 존재이다.
리처드·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그저 생체 기계일 뿐 DNA가 우리의 진짜 주인인 가능성도 있다.
내가 지금까지 포스팅을 통해서 주장했듯이 우리는 프로그래밍된 존재이며 그 알고리즘에 의해서 정교하게 움직이는 유기체 로봇일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고 제가 지금 수 많은 선택을 직접 해냈다는 느낌 자체가 거짓이란 없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느끼는 만족감이 그저 미각 신경을 통해서 뇌에 신호가 전달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맛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열심히 노력하고 자격증을 취득했을 때도 자격증 취득이라는 것이 어쩌면 취업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종이 조각 하나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 성취감을 느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할 수 없다.
게임에서 이길 때 내가 쾌락을 느끼는 것이 도파민 분비를 통한 감정 변화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고 해서 내가 쾌락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감정과 우리의 느낌 가운데에 있고, 제가 느낀 쾌락은 누구도 대신에 느끼지 못하고, 절대로 모방할 수도 없다.
내가 있기 때문에 쾌락이 있고 내가 없으면 그 쾌락도 없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공간은 무의미하면 끝없이 무의미하게 될 수 있는데 의미를 부여하면 무한하게 부여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당신의 세계는 당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
나의 세계는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
당신의 세계에서는 나의 존재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듯, 나의 세계도 그렇다.
결국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나일 수밖에 없고, 내가 천한 삶을 살든 멋진 삶을 살든 그것은 하나의 껍데기인 것이며 그 중요도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이를 깨닫는 것은 매우 어렵다.
나도 글로는 화려하게 표현할 수 있어도 실제로 그런 태도를 삶에 적용하기는 참 어려운 일이다.
이를 인정해야 한다.
또 우리는 이미 DNA 단계부터 결정돼버린 특정 형질 덕분에 내가 굳이 힘들이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여러 특성을 보유하고 있다.
이것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어. 그 특성은 키가 크거나 잘생긴 외적인 장점일 수 있지만, 반대로 성인병에 취약하거나 암 발병률이 높은 체질일 수 있는 건강상의 나쁜 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수십만 년을 거쳐 진화한 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우리는 약한 존재이자 작은 존재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단지 생체기계일 뿐 DNA가 우리의 진짜 주인일 수도 있다.
내가 지금까지 포스팅을 통해 주장했듯이 우리는 프로그래밍된 존재이며 그 알고리즘에 의해 정교하게 움직이는 유기체 로봇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오늘 수많은 선택을 직접 해냈다는 느낌 자체가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느끼는 만족감이 오직 미각신경을 통해 뇌에 신호가 전달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맛있다는 느낌을 받았음은 부정할 수 없다.
열심히 노력해서 자격증을 취득했을 때도 자격증 취득이라는 게 어쩌면 취업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휴지조각 하나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고 해도 그 성취감을 느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게임에서 이길 때 내가 쾌락을 느끼는 것이 도파민 분비를 통한 감정 변화라는 것을 명확히 안다고 해서 내가 쾌락을 느끼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감정과 우리의 느낌의 한가운데에 있고, 내가 느낀 쾌락은 누구도 대신 느낄 수 없고 절대 모방할 수도 없다.
내가 있기에 쾌락이 있고, 내가 없으면 그 쾌락도 없는 셈이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공간은 무의미하면 끝없이 무의미해질 수 있지만, 의미를 부여하면 무한히 부여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풍족하든 아니든 간에 생을 하사받은 것은 드물다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찰나를 살아가는 하찮은 생명이지만 생명이라는 것은 우주에서 매우 희귀한 개념이다.
우리는 그 희소성을 가지고 이 땅 위로 태어난 것이다.
어떤 별 보다도 어떤 블랙 홀보다 귀중한 존재가 우리들이라는 점이다.
이 우주에 우리밖에 없으면 어떨까.다른 지적 생명체가 없으면 어떨까.결국 의미는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며 우리의 인생의 행복과 소중함은 내가 느낄 때 설명 가능하다.
어린 시절 가난한 나라 어린이들과 우리의 인생을 비교하면서 행복을 느끼고 보자는 교육을 한번 받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대적 행복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행복은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지 남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평소 질투하고 있던 사람이 불행한 사건을 당해추락했다.
그 사실이 우리 인생을 바꿀 수는 없다.
저는 한달에 100만원을 벌지만, 어떤 사람은 30만원도 받지 않는다고 해서 제 월급이 늘어나지 않는다.
상대적 행복은 진정한 의미에서 행복과 말할 수 없고 그저 비교를 통해서 얻은 상대적 우위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찰나를 살아가는 보잘것없는 생명이지만, 생명이라는 것은 우주에서 매우 희소한 개념이다.
우리는 그 희소성을 가지고 이 땅 위에 태어난 것이다.
어떤 별보다, 어떤 블랙홀보다 귀중한 존재가 우리라는 점이다.
이 우주에 우리밖에 없다면 어떨까. 다른 지적 생명체가 없다면 어떨까. 결국 의미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고, 우리 삶의 행복과 소중함은 내가 느껴야 설명 가능한데 말이다.
어린 시절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과 우리의 삶을 비교하며 행복을 느껴보자는 교육을 한 번쯤 받아봤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대적 행복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행복은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지 남이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평소 질투하던 사람이 불행한 사건을 당해 추락했다.
그 사실이 우리의 인생을 바꿀 수는 없어. 나는 한 달에 100만원을 버는데 어떤 사람은 30만원도 못 번다고 내 월급이 늘지 않는다.
상대적 행복은 진정한 의미에서 행복이라고 말하기 어렵고, 단지 비교를 통해 얻은 상대적 우위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새해에 소원 빌고 로또 사.새해가 밝으면 우리는 소원을 한다.
일년이 잘 되도록 해달라는 소원을 하늘인 내가 믿는 신이며 혹은 중요한 존재에 말했다.
그 행위를 살아 있는 동안 계속 아니어도 몇번도 온 것이다.
정말 그 소원의 덕분에 인생이 풀린 것이냐고 묻자 그 바람이 정말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기도하느냐고 묻자, 아마 다르다고 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래도 내년 새해가 밝자 그들은 같이 소원이다.
비록 그 소원이 어차피 가질 수 없는 것을 알면서이다.
하지만 소원을 빌며 한해가 기대되어 마음이 설렌다 뭔가 성취를 이룰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은 정말 긍정적인 의미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로또가 확실하게 쐬려고 구매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첨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당선된다면 무엇을 하면 계획을 세우고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망상에 빠지는 것이 로또 복권을 샀다면 따라오는 부가적인 서비스이다.
정말로 복권에 중독된 사람 아닌 이상, 로또는 당선 날을 기다리며 설레는 감정을 사는 행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안 맞어도 다음 주 당선 날을 기대하고 다시 구입하기 과연 의미 없는 행위일까?어차피 우리의 삶이 무의미한 이루어지지 않을 꿈이라면 그러나 봐야 한다 꿈이라면 오히려 재미 보는 것이 우리가 최선의 방향성 아닐까.